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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로 불렸던 격정의 유대인 구출작전

한 인간의 열등감과 증오심이 인류 역사에 가져온 끔찍한 참상,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 학살과 2차 세계대전을 겪고도 인류는 아직도 증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나온 역사의 과오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려서 일까.   30년 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발표한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는 나태하고 둔감해진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다. 인류 평화는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마음들이 모여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가 1100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건진, 자기희생의 위대함!     '쉰들러 리스트'는 단순히 유대인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영화 중 가장 단연 최고로 손꼽히는 '쉰들러 리스트'에는 늘 '다큐멘터리'라는 꼬리가 따라다닌다. 다큐 기법으로 촬영, 제작된 사실 외에도 영화가 다루는 스토리가 실제로 사실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호주 출신의 작가 토마스 캐닐리는 동네 가게 주인 레오폴드 페퍼버그로부터 그가 경험했던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듣고 그에 바탕을 둔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3년 소설 '쉰들러의 방주'를 발표한다.   스필버그 감독은 우연한 계기로 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는다. 당시는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지닌 유대인들에게 또다시 인종혐오를 가하는 네오나치들이 다시 득세하던 시기였다. 스필버그 감독은 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판권을 사들여 영화 제작에 들어간다.     스필버그는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부담스럽게 느껴져 제작자로만 남기로 하고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연출을 의뢰했다. 그러나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영화는 유대인 감독이 연출해야 할 프로젝트라고 제안한다. 이때 물망에 떠오른 사람이 홀로코스트 피해자 유족인 로만 폴란스키였다. 나치의 학살에 어머니를 잃은 폴란스키 감독은 소설의 내용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개인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고심 끝에 거절했다. 그는 2002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피아니스트'로 폴란스키 버전의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발표했다.     스필버그가 세 번째로 찾아간 감독은 유대계 거장 빌리 와일더였다. 1933년까지 베를린에 거주하다가 나치가 집권하자 미국으로 탈출한 와일더는 '쉰들러 리스트'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와일더는 스필버그에게 직접 연출을 맡을 것을 독려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를 발표한다.   1939년, 독일에 점령당한 폴란드의 한 도시를 찾은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리암 니슨)는 유대인이 경영하는 도자기 그릇 공장을 인수한다. 나치 장교들을 매수해 수백 명의 유대인을 인건비 없이 고용한다. 냉정한 기회주의자이지만 유대인 회계사 스턴(벤 킹슬리)과 가까워지면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감을 품기 시작한다. 그리고 참사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의 양심이 움직인다.     쉰들러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가 필요하다며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빼내 오기 위해 9개의 명단,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가 작성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탈출과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써버린다. 그가 구해낸 유대인 1100명은 종전 후 자유의 몸이 되지만, 쉰들러 자신은 나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전범자가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된다. 쉰들러는 더 많은 유대인을 구해내지 못했음을 자책한다.     영화는 빨간 코트를 입고 등장하는 아이와 종결부 생존자들이 쉰들러의 묘비를 찾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흑백으로 편집됐다. 독일군 장교 괴트(랄프 파인즈)가 게토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유대인을 학살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빨간 코트 입은 소녀는 쉰들러를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쉰들러는 빨간 코트 소녀가 사망한 것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을 구해내는 계획을 주도한다.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각인되며 영화사에 길이 남는 명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악의 화신' 괴트 앞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했던 쉰들러였지만 자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그의 인간적 감정이 무너져 내린다. 유대인들은 감사의 표시로 탈무드의 글귀가 적힌 금반지를 만들어 쉰들러에게 건넨다. 유대인의 금니를 뽑아 녹여서 만든 반지였다. 생니를 뽑는 고통에도 쉰들러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어 기쁘다는 유대인의 미소는 평화 안에 안착하지 못하고 다툼을 이어가는 인류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영화는 대부분 실화에 기반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장면, 특히 나체 검열이나 가스실 촬영은 지나치게 사실적이라 배우들의 심리적 고통이 컸다고 한다. 쉰들러가 아내를 두고도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은 영화적 상상력에 기반한 설정이다.     도입부에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선율 '글루미 선데이'는 헝가리의 유대계 작곡가 레쪼 세레스가 죽음과 좌절을 소재로 작곡한 곡이다. 이 곡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분위기로 인해 전쟁 중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자 '헝가리의 자살 노래'로 불렸다. 세레스 자신도 결국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노래는 재즈 싱어 빌리 할러데이가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쉰들러 리스트'는 처참했던 유대인들의 상황과 기회주의자였던 쉰들러가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으며 제66회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7개 부문을 수상했다.   김정 영화평론가다큐멘터리 구출작전 유대인 감독 유대인 학살 소설 쉰들러

2023-12-22

[삶의 뜨락에서] 고요한 숲속에서 갑자기 총성이 -발틱 3개국, 폴란드 여행기 2

하마스 테러로 촉발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긴장이 고조됐던 시기, 뉴욕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 유대인 가족이 타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랍비 복장,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아들도 같은 차림이었다. 아이는 일곱 명, 큰딸이 엄마를 대신해 우는 아기를 돌봐주고, 다른 아이들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뛰어다녔다. 승객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독일, 오스트리아, 발칸 반도, 발틱 3개국, 폴란드를 여행하다 보면 슬픈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 현장을 피할 수 없이 만난다. 유대인 희생자들의 동상은 대개 이름이 없다. 체코 프라하 유대인 묘지 앞에 울고 있는 한 동상이 서 있었다. 가이드에게 “왜 이름이 없어요?” 하고 물었다. “It could be any Jew.” 오스트리아 빈 오페라 하우스 바로 건너편에 쇠사슬에 묶여 땅바닥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동상도 이름이 없었다.     이번 여행 중 유대인 집단촌과 뮤지엄, 홀로코스트 현장을 지났다. 발틱해 가장 북쪽에 있는 에스토니아에서도 희생자가 많았으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가 훨씬 더 많았다. “왜 그런가요?” 가이드의 대답 “라트비아는 1000년 전 독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몰려와 리가와 교외에 집단촌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리투아니아는 오래전 다른 종교에 관대한 것으로 소문나 유대인이 대거 이주 ‘발틱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2차 대전이 터지고 나치는 유대인 학살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발틱에는 수용소가 없었습니다. 나치는 이들을 잡아다 아름다운 숲으로 끌고 갔습니다. 라트비아 여름 숲속에서 수십만 명이 총살당했습니다.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집단촌은 명문 국립대학 바로 위에 있었습니다. 나치와 나치에 협력한 리투아니아 경찰이 끌고 고요한 숲속으로 데려가 웅덩이를 파고 옷을 벗겼습니다.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놀란 새들과 들짐승이 달아났습니다. 유대인들은 낙엽처럼하나둘 떨어져 웅덩이에 묻혔습니다. 처형을 기다리던 유대인 13명이 밤중에 땅굴을 파서 도주해 살아남았습니다. 나치는 80명을 동원해 증거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리투아니아 전국에서 70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인구는 지금의 280만 명보다 훨씬 많았으나 거의 20%를 잃었고, 그들은 무고하고 재능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에서 남으로 11km 숲속에 Panerial Holocaust 기념비가 당시 비극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치는 폴란드에 수용소를 설치해 1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독살했다. 여행 중 아우슈비츠 학살 현장을 찾고 싶었으나 바르샤바에서 300km나 떨어져 일정상 가지 못했다.     폴란드에는 2차 대전 약 40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으며, 집단촌에 10만 명이 있었다. 좁은 방 하나에 7~8명이 모여 살아 질병으로 죽은 이가 많았다고 한다. 참다못해 유대인들은 집단 반란을 일으켜 1만5000명이 피살되었고 이 사건은 가스 처형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바르샤바 올드 타운에 Polin Jewish Museum, 큰 빌딩이 있다. 여기서 폴란드 유대인의 1000년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수백 년 전 나무집시나고그가 인상적이었다. 뮤지엄 앞에 당시 폴란드 외교관이었던 Karski 동상이 있다. 그는 유대인들을 구출해 런던 등지로 보낸 영웅이었다. 최복림 / 시인삶의 뜨락에서 폴란드 여행기 유대인 집단촌과 유대인 희생자들 유대인 학살

202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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